아카이브는 윤리적 의지의 문제
CMS Color Management System
이것을 이야기 하며 원론적인 기술 이야기는, 이제는 할 필요 없다.
왜 다른지, 같아져야 불필요하게 반복적으로 신경쓰이는 일을 덜 만들수 있는 단순한 해결 방법일 뿐이다.
테스트베드 환경으로 대형 프린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홈페이지에서도 여러번 이야기 했지만, 환경 유지를 위해 매우 번거롭고 소모적인 시간들이 반복 된다. 이 반복적인 소모적인 시간들을 외부 지인들의 아트출력물로 지원해 보자 생각하고 진행 할때 마다 후회하게 된다.
이 글을 보는 주변 지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의뢰하는 사람들은 던져주는 이미지 품질이 어떻든, 가정용 프린터 처럼 버튼 한번 딸깍하면 자동으로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10년, 20년을 작가로 활동해온 분들에게서 전해오는 이미지들에 95%는 한숨만 나온다.
내 출력 히스토리는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한가지 조건을 갖고 있다. 내게 자극이 되는 이미지라면 최상위 파인아트지를 사용하더라도 무료로 출력해 주기도 한다.
파인아트 프린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어떤 기기가 더 좋냐”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현재의 파인아트 프린터 기술 수준을 기준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이미 핵심을 벗어나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상위급 파인아트 프린터들은 기술적으로 이미 충분히 정밀해졌고, 정상적인 조건에서 출력된 결과물 간의 차이는 전문가의 눈으로도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 있다. 색 재현력, 그라데이션의 연속성, 미세 디테일 표현, 안료 잉크의 안정성, 아카이벌 종이와의 결합까지, 기술 자체는 더 이상 출력 품질의 병목 지점이 아니다.
동일한 급의 파인아트 프린터에서, 동일한 조건과 올바른 소스를 사용해 출력된 결과물들은 ‘품질 편차’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기술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조건의 대부분은 프린터라는 기계가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파인아트 프린터는 일반 사무용 프린터와 달리, 자동화된 완성품이 아니다. 잉크는 소모품이 아니라 재료에 가깝고, 프린트 헤드는 정기적인 관리와 상태 점검을 전제로 작동한다. 노즐 상태, 캘리브레이션, 잉크 사용 기한, 환경 온습도, 종이 보관 상태까지, 이 모든 요소가 정상적으로 관리될 때 비로소 ‘파인아트 품질’이라는 결과가 성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되지 않은 프린터로 출력된 결과물이 기술의 한계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출력 의뢰하며 제공하는 소스 이미지 역시 품질 문제의 핵심 원인 중 하나다. 저해상도 이미지, 과도하게 압축된 파일, 웹용으로 변형된 색공간, 원본과 무관하게 가공된 데이터들이 아무런 검증 없이 파인아트 출력물로 나온다. 이 상태에서 출력된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프린터의 성능이나 기술적 한계로 돌리는 것은 책임의 전가에 가깝다. 출력은 소스를 증폭시키는 과정이지, 소스를 복구하는 과정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이 고급화될수록 오히려 이런 문제가 더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파인아트 프린터는 저품질 소스를 ‘적당히 감춰주는’ 장비가 아니다. 오히려 소스의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미세한 계조 손실, 가짜 디테일, 업스케일의 흔적, 잘못된 색 정보는 고급 장비일수록 더 명확하게 출력된다. 이 때문에 출력 품질의 문제를 기술 탓으로 돌리는 것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파인아트 출력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장비의 급이 아니라, 그 장비를 다루는 기준과 양심이다. 프린터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출력 조건을 기록하며, 소스 이미지의 상태를 검증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 출력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태도. 그리고 의뢰자 역시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고, 파인아트 출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료를 제공하려는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맞물리지 않으면, 아무리 고급 장비를 사용해도 결과물은 파인아트라는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
지금의 파인아트 프린터 기술은 이미 충분히 정교하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품질 문제의 상당수는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관리되지 않는 장비와 검증되지 않은 소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묵인하는 관행에서 발생한다. 기술을 의심하거나 변병 도구로 삼기 전에, 먼저 기준과 도덕적 양심을 돌아봐야 한다. 파인아트 출력은 장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판단, 그리고 책임감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회화 작가, 갤러리, 미술관은 이미지라는 영역에서만큼은 ‘최초’라는 전통성과 ‘최상위 전문가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원본을 생산하는 주체이며, 미술사의 시작점에 서 있다는 인식, 그리고 문화적 기록을 다루는 기관이라는 위치가 그 자부심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라는 현실적인 환경 안으로 들어오면, 이 집단은 이상하리만큼 기술적으로 무기력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을 습득하려는 태도 자체가 부재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문제는 단순히 기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은, 그 무지가 내부에서 ‘관행’이나 ‘경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인맥과 위계 구조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잘못된 해상도의 이미지를 사용해도, 그것이 문제라는 지적보다는 “지금까지 다 이렇게 해왔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미지 파일의 크기나 품질을 지적하면, 예술과 기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기술적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 결과, 잘못된 정보는 수정되지 않은 채 미신처럼 이어지고, 다음 세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를 다루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이 디지털 이미지를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시 홍보, 인스타, 아카이브 구축, 온라인 뷰잉룸, 인쇄물, 굿즈, 2차·3차 생산물까지, 미술계는 이미지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곧 작품의 첫인상이 되고, 때로는 작품 그 자체를 대신하는 상황에서조차, 최상위 품질에 대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해상도 이미지가 확대되어 사용되고, 손상된 파일이 공식 아카이브로 남으며, 출처 불명확한 이미지가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다.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희미하다.
전통성을 표명해야 하는 전문가 집단이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할때 마다 나는 기술이 아닌 도덕성의 문제를 느낀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 기억을 보관하는 아카이브의 역할을 맡고 있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기록되고, 어떤 상태로 남겨지는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품질에 대한 무감각은, 결과적으로 문화적 기록을 훼손하는 행위에 가깝다. 디지털 이미지는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미래에 남겨질 가장 직접적인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대한 기준을 외부에서 제시하면, 그것을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니라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자주 목격된다. 그러나 원본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복제와 기록의 질에 더 엄격해야 한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지를 다루는 것은, 붓의 재질을 모른 채 회화를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디지털이라는 이유로 그 중요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은 이제 복제가 아닌 최초 원본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나는 미술인들이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최소한 자신이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이미지가 어떤 상태인지, 그것이 기록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상도와 품질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문화적 아카이브를 다룬다는 자각이 있다면, “이 정도면 괜찮다”는 기준은 더 이상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이미지는 이미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미지를 저품질로 방치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전문성의 포기이자 기록 윤리에 대한 무책임이다. 전통성과 권위는 말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태도와 기준, 그리고 스스로를 갱신하려는 노력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미지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외면한 채 전문가를 자처하는 문화가 계속된다면, 그 집단이 남기는 기록 역시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작업을 하고, 큐레이팅을 하고, 기획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그 안에는 긴장도 질문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솔직히 말해 꽤 재미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미술계 내부에서도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소한 파일일 뿐인 이미지는, 정말로 미래에 보여줄 수 있는 상태인가.






